기동타격대원
- 대장
- 윤석루(자개공)
- 부대장
- 이재호(실내장식업)
- 부관
- 신원미상(운전)
곽정련(???)
- 1조
- 이재춘(공군방위.DJ) – 백곰
양기남(무직, 운전) – 시계
임성택(양복점 점원)
구성회(양화공) – 까치
오정호(식당종업원)
- 2조
- 박승열(레코드판매)
김삼규(전기사 직원)
박명국(양화공)
박영수(가구점 직원)
김두전(재수생)
(고)안성옥(무직) – 2.범
- 3조
- 조장(신원미상)
신원미상(운전)
염동유(다방종업원)
정광호(타이루공)
신원미상
- 4조
- 이상범(무직)
이성주(덤프트럭 조수)
김공휴(나전칠기)
마삼훈(숭실고1) – 똥개
이동용(검정고시준비)
안용순(숭의중3 중퇴)
- 5조
- 김기광(나주한독고3)
도준식(식당종업원)
남영관(대학준비중)
남승우(싯수공)
박흥식(목수)
- 6조
- 박인수(DJ) – 곰돌이
나일성(가구공장) – 하찌
김여수(용접공) – 발발이
김현채(식당종업원) – 더벅이
사무라이(행방불명)
- 7조
- 김태찬(무직)
운전수(가죽잠바)
김재귀(동일실고2)
염용섭(나전칠기) -18 다람쥐
김행남(보일러공)
장승희(양화공)
이정태(식당종업원)
기동타격대 일지
5.22(목, 맑음)
5.23(금, 맑고 한때 흐림)
5.24(토, 오후 비)
5.25(일, 하루 종일 비)
5.26(월, 새벽 비)
5.27(화, 맑음)
- =====================================(이하, 특수기동대)
- 5.22. 차량운행증 발급받고 기동순찰대 활동(날짜 확인필요)
차량운행증을 발부받음. 5명 1조로 기동순찰대 뽑여 지프차를 몰고 외곽순찰함. 하루내내 계속해서 외곽지역에 설치한 바리케이트까지 돌아보고 오는 일을 함. (오인수 현사련 구술)
- (시간미상) 교도소 전투
5.22. 월산동 외곽경비를 나갔음. 그 후 3대의 트럭에 나와 10명의 시민군이 나눠 타고 동신전문대를 지나 말바우시장 입구 사거리에 이르자 교도소 쪽에서 총소리가 났다.(위증회 현사련 구술)
5.22. 시내를 돌아다니는데 서방 쪽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동신전문애를 지나 무등도서관을 향해 갈 때까지 총소리는 그칠 줄 모르고 게속 들려왔다. 우리가가 탄 지프차를 향해 사격을 퍼부었다. 저쪽에 총에 맞아 쓰러져 있는 사람이 있다기에 가서 보니 피를 많이 흘려 신음하고 있었다. 그를 싣고 계림동에 있는 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해달라고 했더니 “이미 너무 많은 출혈을 하여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했다. 잠시 후 그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시신을 도청으로 옮기기 위해 지프차에 실었더니 내가 탈 자리가 없어 나는 걸어서 친구집으로 갔다.(정영동 현사련 구술)
- =====================================(이하, 특수기동대)
- 5.22. 오전 도청 앞. 특수기동대 버스 탑승
5.22. 오전 도청 광장에 있던 24인승 마이크로 미니버스에 탑승했음. 그 버스 앞유리창에는 빨간색 스프레이로 :시민은 도청 앞으로”, 앞 차체와 옆면에는 ‘특수기동대’라고 쓰여져 있었음. 버스 운전석 옆 유리창에는 LMG가 설치되어 있었고, 의자와 유리창 사이에는 약 1cm의 철판으로, 버스 뒷 유리창에는 타이어를 매달아 방탄버스처럼 보였음. 그래서 차체가 무거워 출발할 때 힘들었음. 구술자가 탔을 때부터 LMG 등이 이미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누가 언제 어떻게 설치했는지 알 수 없음. 그 버스에는 약 5~6명의 시민군들이 타고 있었음.(홍홍준 구술)
도청 앞에서 24인승 마이크로 중형 버스를 탔는데 그 차 안에는 캐리버 50과 수류탄이 있었음. 그 차에 탔던 사람들은 모두 12명쯤 되었고 기동타격대가 결성되기 전까지 그 차를 타고 돌아다녔음. 우리는 특수기동대라 불렸음. 주로 순찰의 임무를 맞았으나 도청의 지시와 통제를 받는 경우는 별로 없었음. 우리는 외곽지역인 화정동, 백운동 로터리, 광천동 사거리를 순찰하였고 교도소 앞까지 간 적도 있음. 우리를 지휘한 사람은 무전기를 잘 다를 줄 알았음. 우리는 서로에게 동지애를 느끼며 며칠을 보냈음.(김여수 현사련 구술)
- 광주공원에서 특수기동대원 추가 모짐
특수기동대 버스는 광주공원으로 갔음. 구술자는 버스에서 내려 사람들에게 “광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한 사람들은 버스에 타고”고 소리치면서 모집하여 약 10~12명이 함께 활동했음.(홍홍준 구술)
광주공원에는 ‘특수기동대’라고 씌어진 24인승 마이크로버스가 있었고 특수기동대차 안에는 12명 정도의 청년들이 있었음. 특수기동대 대원 중 26일 조직된 기동 타격대로 활동했던 대원은 나, 인수, 여수, 그리고 별명이 사무라이라는 친구였음. 그 중 ‘석이’는 자기가 버스에 고무장갑을 끼고 페인트로 특수기동대라고 썼다고 했는데 아마도 그 당시 TV에서 테러진압대의 활동을 그린 외국영화 제목이 특수기동대였는데 그 이름을 딴 것 같았음.
특수기동대는 시내와 외곽지역의 순찰을 맡기로 하고 언제 죽을지 모른다며 호주머니에 각자의 주소와 이름을 적어 넣어두기로 했음. 특수기동대를 지휘하는 사람은 두 명이었는데, 한명은 해병 출신이었고, 한명은 몇 달 전에 무전병으로 제대한 사람이었음. 우리 차는 시내를 순찰하다가 도청으로 들어갔음.(김현채 현사련 구술)
5.22. 광주공워에서 총기를 나누어준다는 소식을 듣고 가서 M1을 지급받았음. 아마 이날로 기억되는데 미니버스에 7~8명이 함께 타고 다니면서 ‘특수기동대’활동을 시작함. 버스에 특수기동대라는 글씨가 페인트로 쓰여있었음. 기동순찰대가 치안유지, 계엄군 동태파악이 주된 임무라면 특수기동대는 계엄군과의 교전을 목적으로 활동하였음. 그래서 철판으로 창문을 막고 타이어로 차 뒷면을 가리고 다녔고 대원들도 얼굴을 가리고 다녔던 기억이 남. 초반이라 도청 내 상황이 어수선할 때였지만 특수기동대는 나름 체계를 갖춘 조직이었음. 대장처럼 활동한 사람(구술자보다 연장자인것만 기억)이 있었는데 도청 내 상활실로부터 직접적인 지시나 보고를 받은 것 같지는 않음. 자체적으로 활동했고 해산될 때까지 계속 같은 인원이 활동했음. 그런데 잠을 어디서 잤는지 무얼 먹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데 계엄군 동태파악을 위해 어느 건물 옥상에 가서 하룻밤 잔 기억이 남.(박인수 구술)
광주공원에서 총을 받아 시위차량에 올라탐. 차는 21호차 미니버스로 10여명이 함께 움직임. 지휘관은 중사 제대한 예비역으로 총 쏘는 법 알려줌. 차 앞창 유리를 깨고 기관총을 달고 버스에 10미리 철판을 댐.(유성용 재단증언)
- 08:55 광주교도소 계엄군과 교전
교도소 부근에서 계엄군과 데모대원간에 교전중으로 인명피해 3명(논바닥에서 뒹굴고 있음)
(광주시, 5.18사태 상황 및 조치사항)
- 담양 방면으로 가려던 버스와 트럭에 일방적으로 계엄군이 기관총 사격-도청 시민군 출동(박남선 오월, 204)
- 오전 10시-11시 동신고 건너편 교전
동신고 건너편에 있는 산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며 총을 든 사람은 모두 트럭에 타라고 해서 탑승함. 25-30명의 시민군이 야산(현재 말바우시장 자리)으로 올라가 보니 건너편 산에 큰 철탑 앞에 매복해 있던 공수들은 우리 쪽으로 사격을 함. 약간 총격전을 벌였음. 우리 편의 증원군 2진, 3진이 도착하자 공수들은 계속 총탄을 퍼부었고 이에 놀란 시민군의 차가 급히 방향을 돌렸음. 이 와중에서 시민군 한 명이 다쳐 병원으로 옮겨졌고 증원군 중에 친구 박인수 봤음.(김현채 현사련 구술)
- 외곽순찰활동
5.22~5.24.까지 교도소 인근, 지원동 인근, 농성동 인근, ,백운동 인근 등 계엄군이 경계하고 있는 지역 순찰하면서 교전 대비함.(박인수 구술, 김여수 김현채 현사련 구술)
- =====================================(이하, 특수기동대)
- 18:00 김화성, 기동순찰대 편성
5.23. 18:00 도청에서 김창길로부터 순찰대 편성지시를 받아 15명을 4개조로 편성하여 순찰 지시(김화성 판결문)
- (시간미상) 순찰대 편성
5.23경 외곽지역에서 경계근무하는 사람들이 매우 피곤해보였기 때문에 보관 뒤 마당에서 시민군들을 대략 10명씩 5-6개 조를 편성하여 보냈는데 어찌된 일인지 보내고 나면 임무교대를 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없었음(황금선 구술)
- 순찰대 편입
5.23 기동순찰대로 편입함. 수위실에서 무전기 하나를 받고 몇 명씩 짝을 지어 차를 타면 순찰대로 인정해 줌. 계엄군의 동태파악으로 시내와 변두리 순찰함. 무전기로 사고지역 알려주면 출동함. 혹은 동네에서 순찰대가 음식을 실어와 도청 앞에 내려놓으면 보급조가 도청 안으로 가져감.(이재춘 구술)
5.23 오후 본관 1층 로비에서 약 15명 정도 모여 기동순팔대가 조직되었고 순찰대장은 김화성이었음. 한조에는 3~4명씩해서 4조가 구성되었고 조별로 짚차와 무전기를 배당받았음(이관근 구술)
5.23 13:00경 도청에 들어가 총기와 실탄을 지급받아 상황실장 김화성으로부터 고유번호 '경계16번'을 부여받고 도청 상황실 옆에서 출입자 통제 등 보초근무하고,(이관근 판결문, 총서30)
5.23경 도청 총기회수반이 총기를 회수한다고 하여 총기를 반납하기 위해 도청에 들어왔다가 바로 기동순찰대로 편제. 5.27 연행시까지 도청에 있을 때는 경찰 옷을 입고 얼굴을 가리기 위해 경찰 헬멧을 쓴 채 정문 보초 등 경비(경계) 임무를 했고, 외근 나갈 때는 광주교도소 쪽, 농성동 쪽, 나주 쪽 등 주로 계엄군과의 접경지를 순찰. 이관근이 같은 순찰대의 조장. 이관근을 포함하여 6~7명이 함께 짚차를 타고 움직였으며 도경찰국 건물에서 김화성으로부터 지시를 받고 이야기한 기억이 있는 걸 보내 조직체계는 있었던것 같음(이진호 구술)
5.22일 5.23경 짚차가 중흥동 전봇대 옆에 세워져 있길래 시동을 걸어 운전을 하면서 도청을 들어옴. 짚차를 타고 시내를 다니면서 아줌마들이 주는 밥과 음료수 등을 먹고 남은 것은 도청으로 가지고 와서 주고 총이나 TNT가 어디에 있다는 제보가 들어오면 가지고 와서 김화성(도청 경비근무)에게 가져다 주었음. 기동순찰대의 역할은 누가 명확히 지시하고 지시받은 것이 아니라 그냥 눈에 할 일이 보이면 시키지 않아도 하는 식이었음. 예를 들어 차를 타고 다니다가 환자가 보이면 이송하고 시신도 상무관으로 후송하고 총이 나오면 회수해서 도청에 가져다 그랬음.(임병석 구술)
- 5.23~5.24 의약용 운반 보급(순찰대 활동)
23일에는 몰고 다니던 지프차로 전남대학교에 다닌다는 여학생과 함께 의약품을 운반 보급하러 다녔다. 그 학생이 집에서 가져온 돈이 꽤 많아 그 돈으로 약국을 돌아다니며 구급약, 붕대, 장갑, 마스크 등을 사서 도청 상황실에 가져다 주는 일이었다. 가끔 전남대 병원에서 의약품을 얻기도 하였다.(오인수 현사련 구술)
- 5.23. 지원동 숭의실고 경비 및 교전(날짜확인)
23일은 도청에서 아침밥을 먹고 경비를 서기 위해 지원동으로 갔다. 그날 시민군 본부에서 특별히 내린 명령은 오토바이를 타고 오는 사람을 무조건 잡으라는 것이었다. 특공요원이 상황을 염탐하러 올 염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박병선과 나는 다른 두 명의 경비요원과 함께 지원동 숭의실고 앞에 있는 다리에서 경비를 섰다. 숭의실고 옥상에는 매복 시민군 20여 명이 있었다. 우리들은 외곽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의 신분을 확인했다. 우리가 경비를 서고 있을 때 주위에 있는 많은 시민들이 격려를 해주며 주먹밥, 김밥, 음료수, 담배 등을 가져다 주었다. 피곤해서 그런지 밥이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았지만 시민들의 격려에 힘이 솟았다. 숭의실고에 매복하고 있는 시민군과 학교 뒷산에 있는 계엄군 간에 총격이 벌어지곤 했다. 우리들은 산을 향해 가끔씩 사격을 했다. 그 사이에서 총상당한 시민이 여럿 있었다. 내가 본 것만 해도 몇 명 된다. 어떤 남자는 피투성이가 되어 오토바이에 실려갔다. 또 앰뷸런스 한 대가 부상자를 싣고 가는 걸 보았다. 아주머니 한 분은 총소리에 놀라 기절을 했으므로 주위 사람들이 리어커에 싣고 가기도 했다.(위종희 현사련 구술)
지원동에서 계엄군이 총으르 난사한 후 부상자가 발생하였다고 해서 출동함. 다른 시민군들이 리어카에 아주머니를 싣고 이동하는 동안 구술자 일행은 엄호사격을 하였음.(도준식 구술)
- =====================================(이하, 특수기동대)
- 아세아자동차, 하수구 철판 뜯어냄
5.23 아세아자동차에 들어가 하수구를 덮어놓은 5미리 철판을 뜯어 버스로 창문을 막음.(김현채 현사련 구술)
- =====================================(이하, 기동순찰대)
- (시간미상) 5.24 산소통 통합병원에 지원
군인들 사이 오인사격이 있어서 통합병원 육군대령이 산소를 지원해달라고 요청이 와 병원에서 구한 산소를 가지고 기동순찰대원과 무장을 한 채 가서 통합병원 입구에서 산소통을 넘겨주고옴(정태호 현사련 구술)
- (시간미상) 5.24 지원동 여성환자 구출작전 기동순찰대 발동
5.24. 상황실의 연락을 받고 지원동 버스종점으로 감. 산에 있는 계엄군이 총을 쏴 여성 1명이 논에 쓰러졌다고 함. 우리 조와 다른 1개의 순찰조가 출동함. 현장에서 순찰대 재편함. 모모조와 닐리리조. 내가 모모조의 소대장을 맡음. 닐리리조가 먼저 출동하여 백기를 흔드는데도 계엄군이 사격함. 결국 여성을 구해서 들것을 만들어 데리고 나옴. 이 여성을 20년만에 만남(이재춘 구술)
5.24경 증축공사중인 숭의실고에 배치를 받아 갔는데 그때 순찰대 다른 조에서 환자인지 부상자를 구조하기 위해 그 인근에 갔다가 계엄군과 교전이 있었고 계엄군이 쏜 유탄이 구술자의 배에 맞아 아직까지 흉터가 남아있음.(이관근 구술)
5.24경 지원동 숭의실고 인근에서 부상당한 여성을 병원으로 이송하기 위해 1조(양기남, 이재춘, 구성회 등)와 함께 10여 명 이상 출동하러 갔다가 계엄군과 교전한 적이 있었음.(이진호 구술)
- 서무과 경계근무
15:00 도청에 들어가 김화성으로부터 '고유번호 31번'과 총기지급박고 서무과 앞에서 경계근무(조총기 판결문, 총서46)
- 순찰대 편입
5.24 07:00 도청에 들어가 5.25 기동순찰대 1조에 편성되어 황금동 콜박스 순찰, 도청 후문 경계근무(이상태 판결문, 총서30)
- =====================================(이하, 특수기동대)
- 전신전화국, 시외전화 연결시도
5.24 기자들의 부탁으로 원고송고를 위해 시외전화를 연결하라는 수습위원회의 지시를 받고 전신전화국에 가서 시외전화 연결하려고 하였으나 여직원이 불가능 하다고 하여 되돌아옴(김현채 현사련 구술)
- 무기회수로 인해 특수기동대 해체
특수기동대차를 타고 순찰을 도는데 양동다리에서 승용차에 탄 사람들이 무기를 회수한다고 했음. 우리는 그들의 머리에 총을 쏴버리고 싶었음. 어떻게 되든 광주를 지키고 싸워야 할 판에 무기를 회수한다는 것은 스스로 자폭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으나 어찌 됐는지 특수기동대는 해체되어 버렸음(김현채 현사련 구술)
무기를 회수할 때 우리는 도청 현관으로 들어가 도청에 있던 누군가와 얘기를 하고 특수기동대원 모두 무기를 반납했음. 특수기동대가 해체됨과 동시에 곧바로 기동타격대가 편성됐음(김여수 현사련 구술)
- 5.25로 기억되는데 특수기동대가 해체된 후 기동순찰대가 조직된다는 소식을 듣고 김여수, 사무라이, 본인이 기동순찰대로 들어갔음(박인수 구술)
- 아침. 기동타격대 결성 관련 사전 회의(확인필요)
5.25 아침으로 기억되는데 본관 2층 오른쪽 사무실(기획관리실장실)에 윤석루 포함 6~7명 정도 모여서 기동타격대 조 결성을 위한 회의를 하였음. 계엄군 주둔지를 돌면서 순찰해야했기 때문에 운전이 가능한 사람들이 우선 모여서 회의를 한 것 같음.(구술. 곽정련)
- * 5.26. 기동타격대 결성 후 활동
<1조>
13:00 풍향동
풍향동 출동-식칼강도 신고된 20세 가량 성명불상자 체포하여 도청 조사과에 인계
15:40 성하맨션
성하맨션에서 마스크, 양말, 식빵 받음
17:30 대인동
기동타격대1조 대인동에 출동하여 성명불상자 체포, 조사과 인계(이재춘 구술, 이재춘 등 1조 판결문, 종서46 102. 149-152)
<2조>
17:00 박승열 등 5명은 짚차를 타고 풍향동에서 식칼난동자 체포, 조사과연계
21:00 계림동 권총강도 출동했으나 체포못하고 일대순찰
5.26. 11:00 군용짚차로 충장로,금남로,터미널 순찰.
15:00 서방, 양동시장 순찰, 21:00 풍향동 순찰(박승열 판결문, 총서46, 181)
<3조>
15:00 조선대 부근 순찰
17:00 황금동, 백운동, 방림동, 대인동 순찰, 터미널부근에서 30대 여인 체포하여 기동타격대실에 인계.
21:00 광주시내, 전대 입구와 산수동 사이 순찰
24:00 다시 순찰(정광호, 염동유 판결문, 총서46, 155-156)
<4조>
14:30~15:30 광주공원, 양동시장, 전남방직, 금남로 등지 순찰
19:00 광주공원 인근에서 강도에게 위협사격,
5.27. 04:30 대치
<5조>
18:00~19:00 서방, 대인동, 광주공원, 금남로 일대 순찰
21”20~22:00 금남로, 광천동, 양동복개상가 순찰
22:30~5.27.02:00 똑같이 순찰
<6조>
15:00 광천동사거리에서 여수수협트력에 타있던 군인 2명 추척하여 1명 체포후 상황실로 인계
17:00 기동타격대 결성
18:30~19:30 도청시민관, 서방, 공용터미널, 금남로, 충장로 순찰
20:00~20:30 도청, 금남로, 충장로, 전남매일신문 순찰.
21:20~22:00 도청, 금남로, 유동, 양동국교, 월산동, 천변순찰
* 17:00 4조가 광천동 동화석유 인근에서 계엄군과 교전중이라는 무전보고. 계엄군 1명(상무대 김기범 생포.-통합병원에 보냄(박남선 오월그날, 257)
<7조>
23:00 기독병원순찰
23:50 지원동 일대 순찰
5.27. 03:00 15명 계림국교 이송
- 오전. 윤석루, 이재호 기동타격대 결성논의
5.25.경 황금동에서 어떤 사람이 술을 마시고 총기를 난사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 후 잡아와서 다음날 술이 깬 후에 이야기를 해보니 한양대 공대 출신이면서 계엄군의 만행에 울분을 토하는 것을 보고 같이 활동하자고 제안함. 이 사람이 이재호였으며 머리도 좋고 행동도 강직한 것 같았음. 기동타격대를 결성함에 있어 학력도 높고 연장자인 이재호가 타격대장을 해야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으나 이재호는 구술자가 훨씬 카리스마 있고 열정도 넘침으로 구술자를 대장으로 모시고 본인은 옆에서 보필하겠다고 함. 따라서 본인이 대장, 이재호는 부대장, 그리고 본인을 옆에서 밀접 경호한 부관(짚차 운전. 키가 큼. 인적사항 모름. 5.27.이후 생존여부 알 수 없음) 등 3명이 기획관리실장실을 기동타격대 사무실로 사용함.(윤석루 구술)
이재호가 기동타격대 선언문을 작성했고 ‘장남이 아닐 것, 미성년자가 아닐 것, 총을 다뤄본 경험이 있을 것'을 기준으로 두고 타격대원을 선발함. 김재귀(고2)는 끝까지 타격대를 하고 싶어 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임.(이재호의 부인 이혜옥 구술)
- 12:00경 기동타격대 모집방송
정오쯤 윤석루가 핸드마이크로 가동타격대 모집하니 청년은 모이라고 함.(안성옥 현사련 구술)
- 12:20 기획관리실장 상경
사태현황보고(전라남도, 5.18사태 주요시건일지)
- 14:00 기동타격대 결성식, 선서문 작성
5.26. 오후 2시 기획관리실장실에서 결성식을 하였엄. 기동타격대는 광주시내의 치안질서유지와 계엄군의 동태파악이 가장 중요한 임무였음. 이재호 부대장과 본인이 기동타격대만의 비표와 암호를 정하고 선언문도 만들었는데 선언문은 타격대의 기본임무를 중심으로 작성되었음. 타격대가 조직된다는 소문을 듣고 서로 하겠다는 시민군들이 모이자 될 수 있으면 같은 동네로 묶어서 조를 편성함. 기동타격대는 처음에 6조까지 결성했다가 나중에 7조를 추가로 결성.(윤석루 구술)
기동타격대 모집 소문 (사람들 말도 들리고 메가폰으로도 알림)을 듣고 함께 활동한 기동순찰대 모두 기획관리실장실로 감. 양동남, 구성회, 임성택, 오정호와 함께 타격대 1조로 편성. 내가 1조 조장. 6조까지 편성. 7조는 보급조. 기동타격대 편성이 끝난 후 선서를 함. 모자를 쓰고 ‘제1조 백곰'이라고 별명 씀(이재춘 구술)
기획관리실장실은 생각보다 공간이 넓었고 긴 탁자 가운데 두고 30명이 둘러서서 기동타격대결성 선언문을 읽는 것으로 타격대 결성식이 진행되었음. 결성식 후 기동타격대원 30명은 쪽지에 이름과 집주소를 적어서 각자 호주머니에 넣었는데 이것은 교전과정에서 사망할 것을 고려하여 신분을 확인하기 위한 용도였움, 결성식 때 탁자 위에 병 음료수가 놓여져 있었고 누군가 30병의 음료수 뚜껑을 따는데 매우 기술적으로 빠르게 따는 모습이 기억에 남음.(양기남 구술)
<기동타격대 선서>
우리는 계엄군으로부터 광주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계엄군 동태 파악 및 훼손당한 질서를 회복해야 할 기동타격대로서 광주시민의 명예와 우리의 목숨을 걸고 다음을 준수한다.
하나. 계엄군의 동태를 파악하여 시내 진입을 저지하고 끝까지 도청을 사수한다.
하나. 계엄군과 대치하거나 대항할 때는 절대 우리가 먼저 총을 발사하지 않는다.
하나. 개인 총기 소유자나 거동이 수상한 자들을 체포하여 본부에 이송한다.
하나. 싸움, 음주 등 난동자들을 체포하여 본부에 이송한다.
하나. 본부에 이송된 자들은 적절히 조치하여 무고한 자들은 안전하게 귀가시킨다.
하나. 시민의 신고에 신속하고 적극적으로 최선을 다하여 협력에 응한다.
하나. 모든 상황은 기동타격대 본부에 연락하여 대처한다.
- *별명사용(시간에 대해서는 확인필요)
5.26.저녁(판결문에는 20:00로 기재) 기동대를 개편해 기동타격대를 조직한다는 말을 듣고 본관 2층 사무실 에 들어갔음, 일련번호와 별명을 적게 되었는데 본인은 쪽지에 “18번 다람쥐”라고 적고, 그 쪽지를 원래는 철모에 붙어야 하나 호주머니에 넣었음. 나중에 꼭지가 발견되어 기동타격대라는 것이 바로 밝혀졌음. 그 때 기억에는 1번부터 47번까지 일련번호가 매겨진 것으로 기억하는 것으로 보아 기동타격대원이 47명일 것으로 생각함. 특히 제과점에서 가져온 생과지를 먹었던 기억이 생생함. 당시 생과자는 매우 귀한 간식이었기 때문에 그 기억이 확실함(염용섭 구술)
저녁시간이 별관-2층 사무실에서 기동타격대 구성하고 별명으로 된 명단을 메모지에 적어서 부대장에게 제출함.(나일성 구술)
2층 국장실로감, 30명이 이미 있음. 5~6명을 한 조로 7조까지 편성. 조별로 지프차, 무전기, 우비 지급. 이재호가 가명을 쓰라고 해서. 2조 3번 '범'이라고 하고 철모 뒤에 2조라고 씀.(안성옥 한사련 구술)
- 윤석루-회의실2층->본관앞 전경버스하부
이재호-회의실2층->본관앞 전경버스하부
부관-행방불명
곽정련-회의실1층 화장실
- 1조
이재춘-정문앞화단->본관앞 전경버스하부
양기남-본관2층복도->부지사실
오정호-본관2층복도->부지사실
임성택-회의실2층->회의실앞 나무
구성회-광장->본관현관
- 2조
박승열-터미널인근 구 일구여인숙
박명국-터미널인근 구 일구여인숙
김삼규-터미널인근 구 일구여인숙
박영수-터미널인근 구 일구여인숙
김두전-터미널인근 구 일구여인숙
(고)안성옥-터미널인근 구 일구여인숙
- 3조
조장
염동유-정문앞화단
정광호-정문앞화단(판결문)
그 외 2명
- 4조
이상범-회의실2층
이성주-회의실2층 베란다에서 나무
김공휴-부지사실(본)/기획관리실장실(정)
마삼훈-회의실2층
이동용-회의실2층
안용순-회의실2층베란다에서 외부계단
- 5조
김기광-터미널인근 여인숙
도준식-터미널인근 여인숙
남영관-터미널인근 여인숙
(고)남승우-터미널인근 여인숙
(고)박흥식-터미널인근 여인숙
- 6조
박인수-선관위인근상가(총상)
나일성-선관위
(고)김여수-선관위인근상가
(고)김현채-선관위->수위실옆차량하부(교련복 고등학생 함께)
사무라이-행방불명
- 7조
김태찬-2층복도->부지사실
김재귀-7조 군용트럭
염용섭-7조 군용트럭
김행남-7조 군용트럭
장승희-7조 군용트럭
이정태-미상
김종남-월산동무진중인근(??)